[ 김일석 ]
자칭 조폭 두목이라고 하는 그를 몇달전 페북에서 처음 만났다.
아픈 아이를 안고 사는 내게 일면식도 없던 그가 먼저 안부를 물어왔다.
상황을 전해들은 그가 아픈 아내 이야기를 전해주며 나와 아이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그가 시인인줄을 몰랐었다.
그러다 지난 8.15 노동자 시민행진때 상경한 그 조폭 시인을 신촌유플렉스앞에서 처음 대면하게 된다.
최근에 2012년에 출간된 그의 시집 <살아보니 알겠어>를 읽으며 몇번을 눈시울 붉히며 울었더랬다.
나는 그처럼 시를 쓰지 못하지만 그가 쓴 시는 마치 내 마음을 그대로 베껴 놓은듯 유년의 서정까지도 닮아 있었다.
그런 그가 삼십여 년 병치레하던 아내가 쓰러진 후, 고난의 병실을 지키며 코딱지만 한 전화기 자판 두들기며 쓴 힘겨운 투쟁과 서정을 묶은 시집 <조까라마이싱>을 출간한다고 한다. 병원 복도에서 웅크려 자다 작은 소리에 깨어 하릴없이 두들겼던, 새카맣게 탄 기록들을 그가 마음 깊이 연대했던 여러 비정규직 투쟁현장과 밀양, 가난한 공동체의 상처에 바친다는 그의 담벼락 글을 전하며.
여기 그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혹은 그가 쓰는 시가 어떤 시인지를 가장 잘 얘기해 주는 고백같은 시 한편을 필사한다.
나의 시는 / 김일석
나의 시는 두려움이었어
산의 10번지에 살던 유년기의 얘기야
어둠살 내리는 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지
폐허의 정류장 앞을 지나다
우두커니 선 검은 유령을 보았어
오줌을 지릴 만큼 무서웠지
그 앞을 내달리며 큰소리로 노래했어
'황금박쥐'를 백 번도 넘게 불렀을 거야
캄캄한 밤, 바람에 흔들리는 변소의 가마니문은
어린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이었지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던 가난한 겨울
취하신 아버지의 막걸리 심부름도
'황금박쥐'가 없인 아마 못했을 거야
아 얼마나 많이 불렀을까
어두운 골목길을 오르내리며
두려움에 질려 그 노래만 불렀거든
나의 시는 외로움이었어
기성회비를 제 날에 내지 못하면
제자들을 토끼 후리듯 내몰았던 야만의 교실에서
쫓겨나 하릴없이 간 곳이 용당 앞바다였어
바다를 가득 메운 뗏목을 타고 놀 때
외로움이 뭔지도 몰랐지만 그냥 쓸쓸했어
누군가 버리고 간 통줄과 미끼를 주워
해 질 녘까지 꼬시래기와 노래미를 잡았어
집에 갈 때엔 다 버릴 고기였는데
한 마리 한 마리 왜 그리 챙겼는지 모르겠어
뗏목 어딘가에 숨겨둔 가방을 겨우 찾아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혼자 참 많이도 울었지
또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게 슬펐거든
일곱 형제 학교 보내느라 등골이 휘는 어머니께
기성회비 얘긴 차마 할 수 없었거든
그때 바람처럼 어린 가슴으로 쳐들어온
불가항력의 외로움은 여태 살면서
아마 가장 지독한 것이 아니었을까 해
나의 시는 거리에서 시작되었어
꽃잎처럼 날리던 광주의 죽음을 만나면서
난 서서히 거리의 전사가 되었지
투표로 만들어진 권력은 가짜라고 믿었어
몇몇 위대한 인간의 삶이 날 흔들었고
가투가 잦아지며 유치장을 몇 번 들락거렸지
그땐 정말 배를 가르고 싶은 충동으로 살았어
비밀결사의 동지들과 뒷골목에서 술 마시고
퀭한 눈으로 발도 씻지 않고
쪽방에서 뒤섞여 자던 불면의 밤이었지
남포동 한복판에서 오바브릿지에서
대청동에서 서면에서 온천장에서
언제 아가리를 벌리고 우릴 삼킬지 모르는
그 사악한 시대를 끝내는 게 왜 그리 힘들었는지
그래, 젊음만으로 세상과 맞서는 게 무리였을지 몰라
나의 시는 스산한 병원의 그림자였어
아픈 아내랑 병원을 내 집 드나들 듯 했지
극장 문을 나서다가도 응급실로 달렸으며
떡볶이를 먹다가도 응급실로 달렸지
병원은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곳이야
몸과 마음이 찢어지고 썩어들어가도 누구 하나
안타까워하지 않는 도적놈들의 성이고
부품들의 성이지
고립된 하나하나의 인간이 절규하며 몸부림치는
야비한 체제의 본부 같은 곳이야
이 땅에서 병원은
인간이 진화하면서 인간의 길이 아닌
짐승의 길로 가기로 작정한 체제가 만들어낸
최고의 걸작품일 거야
따뜻한 위로가 절실한 사람들에게
언제나 무한의 인내와 많은 돈을 요구했어
아내를 반드시 치료해야 했던 난
이미 두 아이의 아버지고 가장이었거든
나의 시는 아이들의 영혼이었어
무시로 죽음을 넘나들던 아내의 몸에서
가을 하늘처럼 맑은 눈을 가진 아이가 태어났지
그 아이는 기적이었고 신비였거든
엎드리고 일어나고 기고 걷는 걸 보면서
세상의 모든 아이가 신비했어
우연히 발견한 그 감동은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었지
사상공단 입구의 철공소 이 층에서 기적을 본 거지
산 로렌쪼 뒷골목의 기적과 비슷한 것이었어
가난한 노동자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일당 만 원짜리 삶을 붙드는 일이었거든
그 서른 명의 아이들은 기쁨이고 축복이었어
아이들의 성장 궤적을 발견하는데 오래 매달렸지
아이들을 사랑하는 일은 별을 발견하는 것이었고
배우는 일은 태양에 몸을 데는 일이었거든
새월이 흐르고 보니 그 아이들이 날 다 가르쳤더군
이십 년이 훌쩍 지나 비로소 깨달았어
찢어지게 가난했던 아이들에게서 배운 건
언제든 아이들에게 돌려줄 거라 생각했어
아이들이 내 품에 안겨 잠들고 꿈꾸는
동네 어귀 버드나무 같은 할아버지가 되고 싶어
나의 시는 쓸쓸한 섬과 바다였어
바다는 고독을 증폭시키는 곳이야
별과 바람이 어깨에 앉아 소곤대는 곳이지
섬을 기어오르던 파도가 깨어져 대양을 향할 때
정처 없이 유랑하는 뭇 생명의 아우성을 깨닫게 돼
한 번씩 뒤집어엎는 바다는 생명의 양식이거든
사람들이 하나둘 거리에서 떠나고
함성이 넘실대던 반역의 거리가
패배의 찌꺼기를 들이키는 물신의 거리가 될 때
난 아무 말 없이 바다로 떠났지
하늘과 바다에도 아득한 그늘이 있다는 걸 알았어
해풍과 바다냄새, 크고 작은 섬과 우내리, 그리고
물질하는 해녀도 선장도 다방 레지도
그 그늘로 날 초대해주었거든
거기도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거든
침묵하는 바다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난 꿈을 꾸며 돌아올 수 있었지
가끔 사는 게 너무 재미없어 울고 싶어도
바다는 내 투정을 다 받아주며 위로해 주었거든
나의 시는 기도였어
모두가 잠든 어느 겨울밤
도둑고양이처럼 찾아 들어간 작은 예배당에서
가장 낮게 엎드리라는 묵언을 들었어
가진 게 아무것도 없을 때
영혼이 가장 명징할 때
신은 손을 내민다는 걸 알게 되었지
이 세상 어느 것도 허투루 된 것이 없음을 배웠어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지 않으면
단 하루를 살아도 사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어
죽음의 언덕을 향해 피 흘리며
한 걸음 한 걸음 뚜벅뚜벅 걸어갔던 그 영혼의 외침이
바로 우리의 속죄와 평화란 걸 알았어
권력이 아닌 것과는 절대 싸우지 말라는
위대한 훈육이었어
나의 시는 처음부터 노래였어
각성의 밤, 바람처럼 나에게 와서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한 건 오직 노래뿐이었거든
세월을 견디기 위해
제자리에 바로 서기 위해
숙명처럼 불러야 하는 자기치유의 노래 말이야
시가 세상의 무수한 결핍을 사랑하고 있다지만
난 결코 행복하지 않아
아니 행복하지 않으려고 해
그냥
절망의 가지 끝에서
눈물로 깨우치는 노래면 좋겠어
볕 따스한 겨울 어느 날
담벼락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던 유년기의 꿈처럼
잠시 스치는
따스한 안식의 노래라면 좋겠어
김일석 시집 <살아보니 알겠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