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Monologue 2016. 9. 2. 12:47


자기 변화는 최종적으로 인간관계로서 완성되는것입니다. 기술을 익히고 언어와 사고를 바꾼다고 해서 변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최종적으로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바뀜으로써 변화가 완성됩니다. 이것은 개인의 변화가 개인을 단위로 완성될 수는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자기 변화는 옆 사람만큼의 변화밖에 이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자기 변화의 질과 높이의 상한입니다.  같은 키의 벼 포기가 그렇고 어깨동무하고 있는 잔디가 그렇습니다.

<담론> 사일이와 공일이 중 발췌


우리의 삶은 수많은 추억으로 이루어져 있음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모든 추억을 다시 만날 수 있는것은 아닙니다.  과거를 만나는 곳은 언제나 현재의 길목이기 때문이며,  과거의 현재에 대한 위력은 현재가 재구성하는 과거의 의미에 의하여 제한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구나 추억은 옛 친구의 변한 얼굴처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이 추억의 생환이란  사실을 훨씬 나중에야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추억에 연연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추억은 화석 같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부단히 성장하는 살아 있는 생명체이며,  언제나 새로운 만남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푸른 보리밭 중 발췌


미는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글자 그대로 '앎'입니다. 미가 아름다움이라는 사실은 미가 바로 각성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에 대하여 사회에 대하여 삶에 대하여 각성하게 하는것이 아름다움이고 미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름다움의 반대말은 '모름다움'이라고 술회합니다.  비극이 미가 된다는 것은 비극이야말로 우리를 통절히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극에 공감하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인간을,  세상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극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비극의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작은 사랑(warm heart)에서가 아닙니다. 비극이 감추고 있는 심오한 비의를 깨닫는 냉철한 이성(cool heart)을 공유하기 위해서입니다.

비극미 중에서 발췌


"I really conceived I could be a better person with him"
인간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정곡을 찌르는 답변입니다.

관계와 인식 중에서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서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떨리는 지남철에서


「자기 앞의 생」에서 모모가 하밀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살 수 있지,  슬프지만."
하밀 할아버지의 대답은 정답이 못 됩니다. 살 수 있다면 결코 슬프지 않습니다.  생각하면 우리가 생명을 저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은 기쁨만이 아닙니다.  슬픔도 사랑의 일부입니다.  마치 우리의 삶이 그런 것처럼.

사람의 얼굴 중에서


사람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그 사회를 인간적인 사회로 만드는 일입니다. 사람은 다른 가치의 하위 개념이 아닙니다. 사람이 '끝'입니다.  절망과 역경을 '사람'을 키워 내는 것으로 극복하는 것,  이것이 석과불식의 교훈입니다.
'석과불식' 은 한 알의 작은 씨과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한 알의 씨 과실은 새봄의 싹이 되고 나무가 되고 숲이 되는 장구한 여정으로 열려 있는 것입니다.

희망의 언어 석과불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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